고려 말 조선 초기

홍건적의 2차 침입 , 개경 함락 ( 1361년 ) , 개경 수복 ( 1362년 )

먹물 한자 2025. 3. 31.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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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건적이 1차로 침입하였다가 물러난 후 고려조정에서는 적의 침입에 대비한 조치를 강구하였다. 공민왕 10년(1361) 10월에는 각 도에 사람을 보내어 軍의 현황을 점검하여 긴급 출동태세를 확립하도록 하고 각 사찰에서 보유하고 있는 말을 차출토록 하였으며, 그 다음달에는 公侯 이하의 지배층들로 하여금 위계에 따라 차등을 두어 戰馬를 내도록 지시하였다.588) 이러한 조치들은 당시 남쪽의 왜구와 북의 홍건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하여 조정에서 얼마나 고심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 아래 홍건적은 공민왕 10년 10월에 潘誠·沙劉·關先生·朱元帥·破頭潘 등이 1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朔州에 침입하였다.589) 이들은 앞서 침입했던 적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산서지방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진출한 집단으로서, 몽고의 上都(開平)를 빼고 요동을 거쳐 전후하여 동쪽으로 온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추밀원부사 이방실을 西北面都指揮使로 임명하고 同知樞密院事 李餘慶을 파견하여 岊嶺(慈悲嶺)에 木柵을 구축하였다. 또한 참지정사 안우를 상원수에, 정당문학 김득배를 도병마사에 임명하고, 使者를 각 도에 보내어 군사를 점검하는 한편 여러 가지 특전을 내세워 병사를 모집하였다. 다음달인 11월 초에 안우와 이방실이 指揮使 金景磾와 함께 각자 자기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价州(价川)·延州(寧邊)·博州(博川) 등지에서 적을 공격하여 싸움마다 적을 무찌르고 3백여 명을 베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안우를 도원수로 삼아 모든 군사는 그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安州싸움에서 고려군이 크게 패하여 상장군 李蔭과 趙天柱는 전사하고, 지휘사 김경제는 사로잡혔다. 적은 김경제를 그들의 元帥로 삼고 우리에게 글을 보내기를“장차 110만 병력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진공할테니 속히 맞이하여 항복하라”고 하였다.590)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지휘관을 보강하여 참지정사 鄭世雲을 西北面軍容體察使로 임명하였으며 평장사 金鏞을 摠兵官으로, 전 형부상서 柳淵을 兵馬使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공후 이하의 모든 관리에게 명령하여 등급에 따라 군마를 내게 하였다. 이성계는 적을 공격하여 王元帥 이하 백여 명을 베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은 같은 달 16일 밤에 1만여 명의 병력으로 岊嶺柵을 공격하였고 고려군은 크게 패해 안우와 김득배 등이 단신으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이에따라 崔瑩을 개경에 보내어 京兵을 요청하였으므로 공민왕은 사태가 매우 위급함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난을 피하기로 결정하고 개경의 부녀자와 노약자를 먼저 성 밖으로 내보내니 인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11월 18일에 홍건적의 선봉대가 벌써 興義驛(현재 황해도 牛峯)에 이르러 개경을 압박하자 공민왕은 그 다음날 태후·공주와 함께 남쪽으로 출발하였다. 왕의 일행이 利川縣에 이르렀을 때 이미 홍건적은 수도 개경을 무너뜨렸다. 이에 왕은 福州(安東)에 내려가 그 곳에서 정세운을 摠兵官으로 삼아 교서를 내려서 적을 막도록 하였다.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시킨 후 수개월 동안 주둔하면서 갖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적들은 말과 소를 잡아 그 가죽을 펴서 성을 만들고 그 위에 물을 얼려 사람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여서 먹기까지 하였다. 한편 적들은 개경뿐 아니라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홍건적의 개경 점령과 약탈에 대항하여 곳곳에서 저항을 하였는데, 鹽州(延安)人 檢校中郎將 金長壽는 군대를 일으켜 적을 공격하여 遊騎 140여 명을 죽였다. 또한 安邊府와 江華府의 사람들은 거짓으로 항복한 체하고 적들을 술과 음식으로 유인하여 무찌르기도 하였다. 고려 조정도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군대를 정비토록 하였다. 즉 공민왕 11년(1362) 정월 안우·이방실·이여경·김득배·黃裳·韓方信·安遇慶·李龜壽·최영 등은 2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東郊의 天壽寺(長湍郡 津西面) 앞에 주둔하였고, 총병관 정세운은 여러 장병들을 독려하여 개경을 포위하고 그 이튿날 공격토록 하였다. 마침 그 때 눈과 비가 내려 적들의 방비가 늦추어진 틈을 타서 고려군은 사방에서 맹렬히 공격하였다. 특히 이성계는 휘하의 친병 2천여 명을 이끌고 먼저 성에 올라 적을 격파하여 나머지 군사들의 사기가 고무되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591)

 

 즉 이 싸움에서 고려군은 홍건적의 괴수 사유와 관선생 등을 포함하여 10만에 달하는 적병을 죽여 쓰러진 시체가 온 성 안에 가득하였으며, 원나라 황제의 옥새를 비롯하여 金寶, 金·銀·銅印과 병기 등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반격으로 파두반을 비롯한 잔당 10여만 명은 압록강을 건너 도주하여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은 평정되었다.

<羅鍾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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