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일본 역사 왜곡

일제 강점기 연표

먹물 한자 2025. 1. 1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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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영화를 보고 안중근의 의거가 1909년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연표를 정리해봤다.

 

1860 1862년 ~1872년 천주교 박해  
  1863년 12월 8일 고종 즉위  
1870 1875년 9월 20일
부터 22일까지
운요호 사건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의 신호탄으로 여겨지며,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이어졌습니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해안 탐사를 핑계로 조선에 불법으로 침투했습니다. 
-조선의 수군이 방어 공격을 하자 일본은 보복으로 영종진에 상륙했습니다. 
-일본은 함포 공격, 무기 탈취, 주민 살육 등을 저질렀습니다. (영국제 160㎜와 140㎜ 구경 함포 탑재)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의 내용
-원산과 인천의 개항
-일본의 조선 연안 측량권 및 영사 재판권 인정

1880 1880년 공사관 경비 군인 6명 파견 일본 공사관을 경비하기 위해 파견된 6명의 인원이 한반도에 처음 주둔. 이들은 군부대는 아니고 국방무관이었다.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구식 군대가 별기군(근대식 신식 군대)과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면서 조선 왕조를 상대로 집단으로 일으킨 군란(軍亂) 사건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 공사관이 공격당하는 피해를 본 일본은 조선 조정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공사관수비대 명목으로 1개 중대 병력을 한양도성 안에 주둔시키었다. 

이렇게 조선에 주둔하게 된 일본군은 주둔부대 교체 시기에 2개 중대를 바탕으로 갑신정변에 개입했다가 청군과 무력충돌을 벌였다. 청군 측의 병력이 일본군의 열배에 가까운 2,500명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수적으로 압도당했다. 일본측은 군인 4명을 포함한 40명의 사망자를 낸 채 인천을 거쳐 나가사키로 탈출했다. 하지만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 4월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이 텐진조약을 체결하면서 양측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 시키고 파병이 필요한 경우 서로에게 사전에 고지하기로 타협했다. 일본은 2개 중대 병력을 청군 2,500명과 교환하고 조선에 다시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여 조선에서 영향력을 외교적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1894년 경복궁 점령 1894년에 조선 조정이 동학농민운동을 제압하려는 목적으로 청군에 도움을 요청하자 청일간에 맺은 톈진 조약에 의거해 일본군도 조선에 다시 들어온다. 하지만 진짜 난을 진압하려고 온 청군과 달리 일본군은 조선을 점령하려고 인천에 상륙한 다음 남산에 포대를 설치하고 경복궁을 점령해 버린다. 그리고 동학군이 아닌 청군에 기습 공격을 퍼부으며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청나라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고 일본은 청나라 세력을 조선에서 배제시키는데 성공했다. 전쟁으로 청나라를 조선에서 쫓아냈지만 삼국간섭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도로 축소되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일본측은 상황타개를 위해 이듬해에 군인 출신 외교관 미우라 고로가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하여 을미사변에도 가담하였다. 이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조선에는 친러정권이 수립되었고 일본의 영향력은 축소된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결을 시기상조로 보아 부담스럽게 여겨 우선 협상을 택했다. 

1890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1895년 10월 8일 당시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2][3]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 경관, 일본군 경성 수비대 일부[4], 일본인 낭인들[5], 조선군 훈련대[6]가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포함한 조선인 궁중 인사들을 집단 살해 한 사건.

  1896년 군대 재주둔 일본은 1895년 5월 조선내 일본인 및 전신 보호를 명분으로 서울에 2개 보병 대대, 부산과 원산에 각 1개 중대, 철도연선에는 임시헌병대만을 주둔시키고 나머지 병력을 철수시켜 러시아와 긴장국면을 조성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러시아 역시 영국과 일본이 협력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과 타협에 나섰다. 이듬해인 1896년 양국은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통해 양측은 동수의 병력을 조선에 주둔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일본은 서울, 원산, 부산에 육군 4개 보병중대 및 200명 미만의 헌병을 조선에 주둔시키었다. 이 병력은 한국주차대라 불리었고 러일전쟁 직전인 1903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동안 일본은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영국, 미국과 외교적 보조를 맞추며 지지를 확보하였다.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 아관파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1900 1904년 러일전쟁 1904년,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일본 양측간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은 러일 전쟁 중 한반도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주차군을 편성하였다. 개전 후 대규모 일본군이 한국에 상륙해 인천에 주둔한 러시아 함선을 박살내고 다시 한성을 점령,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을 협박해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한다. 사실상 이 때부터 한국은 일본군에 점령된 것이나 다름없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패망했다. 이 때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 아래 일본 육군 병력들이 덕수궁을 점령하여 고종과 관료들을 위협하는 역할도 맡았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 乙巳勒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본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다.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되었다.

  1908년 남한 대토벌 작전 을사조약 이후 일본군은 조선군을 계승한 대한제국군을 강제로 해체시키려 들었고, 대한제국군은 이에 맞서기 위해 남대문 전투 등 교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하고 쫓겨났다. 이후 잔존 대한제국군이 주축이 된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본군은 호남 지방으로 남하해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이면서 의병운동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렇게 한반도 안의 조직적인 저항은 일본군에 의해 사실상 사라지면서 1908년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일본군은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한반도의 유일한 군사 조직으로 군림하게 된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하얼빈 의거 안중근 의사가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1910 1919년 3월 1일 삼일만세운동  
1920      
1930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거 이봉창 의거(李奉昌義擧) 또는 사쿠라다몬 의거(일본어: 桜田門事件)는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이 쇼와 천황을 죽이고자 수류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훙커우 공원 의거 또는 홍커우 공원 사건(虹口公園事件)은 1932년 4월 29일 중화민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제거하거나 타격을 입힌 사건이다. 이 의거에 김구도 관여하였다.

1940 1941년 이광수 친일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1942년 3월 김활란 친일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주최의 ‘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에서 여성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였다. 1942년 1월 조선총독부는 조선임전보국단 산하에 부인대를 신설하여 여성 동원을 강제하였는데 김활란은 지도위원으로 이 단체에 참여하였다. 일제가 전쟁에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하여 1942년 징병제 실시를 발표하였을 때 김활란은 징병제를 맞이하는 조선 여성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국가를 위해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이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내 남편도 내 아들도 물론 국가에 속한 것이다. 국가에 속한 남편이나 아들 또한 내 생명이 국가에서 요구될 때 쓰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출처: 「여성의 무장」, 『대동아(大東亞)』, 1942년 3월 발행 )

  1944년 4월 21일 주기철 순교  옥중에서 순교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대한민국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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